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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 문화의 간헐적 우위

일정한 시대를 넘어서 존속된 생산관계는 스스로 발전시킨 생산력에 의해 전복되며 따라서 생산관계가 생산력에 더 이상 적절한 표현과 사용을 허용하지 모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산력에 있어서는 그 본질에서 대개 인격적이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수행할 능력이 있거나 정당하게 바라는 어떤 것이 경제의 객관적인 형식들에서 더 이상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이 형식들에 필요한 변화는 언제나 그리로 몰아가는 계기들이 다량으로 축적되어야만 비로소 일어납니다. 그때까지는 생산의 객관적 조직이 개별적인 경제적 에너지의 발전에 뒤처져 있습니다. 여성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많은 이유들이 바로 이러한 도식에 따라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근대 산업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전통적으로 여성들에게 부과되었던 엄청나게 많은 가사 활동이 가정 밖으로 이전되었으며 또한 가사 활동에 필요한 객체들도 가정 밖에서 더 싸고 효율적으로 생산되었습니다. 그 결과 시민계급의 수많은 여성들이 적극적인 삶의 내용을 상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활동이나 목표가 그 빈자리를 신속하게 채우지도 못했습니다. 근대 여성들은 여러 가지로 불만족을 갖고 있고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은 채로 보존하고 있는데 이는 그녀들에게 되돌아가서 온갖 종류의 자기 혼란이나 자기 파괴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대 여성들은 자신이 가정 밖에서도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때로는 건전하게 때로는 병적으로 노력합니다.

이 모든 것은 객관적인 기술이 자신의 고유한 그리고 개인들의 발전 가능성보다 더 빠른 발전 경로를 걸어왔다는 사실의 결과입니다. 이에 상응하는 관계가 근대 결혼의 여러모로 불만족스러운 성격의 원인으로 제시됩니다. 그러니까 고착화되고 개인들을 강제하는 결혼의 형식과 생활 관습은 당사자들의 인격적 발전, 특히 그러한 형식이나 생활 관습을 훨씬 넘어선 여성의 인격적 발전에 대립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개인들은 자유, 상호 이해 및 권리와 교육의 평등을 추구하는데 일단 전통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확립된 결혼 생활에서는 이런 것들에 대한 진정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결혼의 객관 정신이 주관 정신보다 덜 발전해 있다고 정식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기본적인 사실들로부터 논리적으로 발전해서 고정적인 법전에 수록된 다음에 어떤 특정 계층에 의해 담지됨으로써 법은 개인들이 느끼는 삶의 다른 관계들이나 욕구들에 대해 경직성을 띠게 되며 그리하여 마침내는 영원한 질병처럼 계속 유전되고 이성이 불합리로 선행이 고난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종교적 충동이 특정 교리의 보배로 결정화되고 이 교리가 노동 분업의 원리에 따라 신자들로부터 고립된 단체에 의해 담지되자마자 종교도 똑같은 우념에 처하게 됩니다. 이처럼 삶의 상대적인 독립성이 객관화되어버린 문화적 형성물들, 즉 역사적 근원 운동들의 퇴적물을 주체들과 대립시킨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역사의 진보에 대한 질문이 그리 난감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모든 답변이 똑같은 설득력을 가지고 입증될 수도 있고 반증될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어쩌면 양쪽이 동일한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우리는 도덕적 상태의 불변성과 진보를 독같이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은 고착화된 원리, 조직 그리고 사회 전체의 의식으로 고양된 명령에 주목하고 다른 한번은 개인들이 이러한 객관적인 이상들과 맺는 관계 그리고 주체가 도덕적인 관점에서 행동할 때의 충분함 또는 불충분함에 주목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진보와 정체는 직접적으로 병존할 수 있으며 그것도 역사적 삶의 상이한 영역들에서 뿐만 아니라 동일한 영역에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주체들의 진화를 눈여겨보느냐 아니면 비록 개인들의 기여로 형성되었지만 객관적이고 고유한 정신적 생명력을 획득한 구성물들의 진화를 눈여겨보느냐에 따라 그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객관 정신의 발전이 주관 정신의 발전을 능가할 가능성과 더불어 그와 상반되는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음으로 여기에서 다시 한번 노동 분업이 전자의 가능성이 실현되는데 갖는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이중적 가능성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종류의 생산에서 대상화된 정신이 개별 인간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은 무수히 많은 역사적 조건들, 선행 작업자들을 전제로 하는 생산양식의 복잡성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생산물은 완전히 개별 생산자의 외부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내적으로 축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노동 분업의 결과로서 무엇보다도 특별히 근대적인 기술에서 나타납니다. 생산물이 본질적으로 단 한 명의 생산자에 의해 또는 덜 전문화된 협업에 의해 제작되었을 때는 그 생산물에 객관화된 정신과 힘의 내용이 주체들이 갖고 있는 정신과 힘의 내용을 크게 능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섬세한 노동 분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개별 생산물이 엄청나게 많은 개인들로부터 정선된 에너지가 집결지가 되었으며 따라서 그 생산물을 단위로 간주하여 그 어떤 개별 인간과 비교해봐도 필연적으로 수많은 측면에서 우월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특성을 갖는 것들과 완성된 것들이 객체에 축적되고 종합되는 과정은 무제한적인 반면 개인적인 것들의 확장은 모든 역사적 시기에서 그것들이 갖고 있는 자연적인 규정성에 의해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