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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먹힘을 통해 거듭나는 우로보로스원리

파이라고도 불리는 원주율은 원주의 길이와 그 지름의 비율을 뜻합니다. 수학에 아무리 관심이 없는 문외한이라도 파이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친근한 수이며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수입니다. 놀라운 것은 파이가 빅뱅의 순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던 신비한 수라는 사실입니다. 과학자들은 태초에 파이와 같은 수가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파이는 그래서 우주수라고도 여겨집니다. 3.1415926535...로 끝없이 이어지는 이 숫자들은 영원히 반복되는 일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원주율을 나타내는 일련의 숫자들은 모두 다 다른 숫자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생일이나 주민번호 등이 모두 원주율 속 어딘가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 숫자들을 문자로 바꾼다면 존재하는 모든 가능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단어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태어나서 처음 말했던그 말들이 이 세상의 모든 무한한 가능성들이 이 원하나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주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수학적 존재라는 것이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그리고 막스 플랑크 등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우리주의 실체입니다. MIT의 물리학 교수 막스 테그마크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외적인 물리적 현실계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수학적 실재가 인간이 의식할 수 있는 수준으로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스크린 위에 비춰진 영화의 영상과 음악이 0이나 1의 형태로 DVD홈에 새겨진 것에 불과한 것과 같습니다. 스크린 위에 투사된 영화를 진정한 현실로 인식하는 것은 망상일 것입니다.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영화는 한낱 환영일 뿐 진정 유일한 실체는 오로지 DVD안에 정보로만 기록될 뿐입니다.

오늘날의 우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만 빅뱅의 순간에는 아직 단단한 물질이 존재하지 않았고 태초의 허공에 쏟아져 내린 것은 엄청난 에너지 폭풍우였다고 합니다. 아득히 먼 옛날 우주가 막 탄생하던 0의 순간에 우주는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정보였습니다. 무의 한복판에 자리한 순수사유이자 수학적 사유만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현실계에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무한의 반영이기도 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기원전 540년경에 이미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듯 수가 우주를 지배한다고 말하며 수학에서 영과 무한을 곱하면 하나라는 이론을 펼쳤습니다. 무한을 뜻하는 신비의 수 파이가 원인 것처럼 그 하나는 커다란 뱀 또는 용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삼키는 형상을 일컫는 개념인 우로보로스처럼 원입니다. 그리스어로 꼬리를 삼키는 자라는 뜻인 우로보로스는 수세기에 걸쳐 여러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상징으로 시작이 곧 끝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입에 꼬리를 문 상태로 뱅뱅 돌면서 우로보로스의 원은 또 무수한 원을 만들어냅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돌고 돈다는 불교의 화엄 철학을 형상으로 나타내면 바로 이런 뱀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세계적인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모든 문명권의 신화에서 자주 반복되고 있는 뱀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인간이 뱀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먹게 됩니다. 순간 낙원은 둘로 쪼개어지고 남자와 여자, 선과 악의분별이 생겨나게 됩니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에서 쫓겨나고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인간의 삶이 뱀의 유혹에서 시작되었듯이 살아간다는 것은 뱀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뱀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 허물을 벗게 됩니다. 달이 그늘을 벗고 다시 차듯이 삶은 뱀처럼 끝없이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산다는 것은 달처럼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지만 뱀처럼 잔혹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말처럼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말성이기 때문입니다. 캠벨은 말합니다. 본질적으로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고통이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캠벨은 두 개의 인도 신화가 나타내는 인간의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데시로 이는 사회 생활을 하고 삶의 방법을 배우고 규칙을 따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마르가입니다. 이것은 길이란 의미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길을 뜻합니다. 자신의 꼬리를 삼키는 우로보로스의 뱀이 그러하듯 자기 자신을 삼키고 다시 태어나는 뱀처럼 자신을 죽이고 다시 차오르는 달처럼 모든 영혼의 삶의 목표는 나의 심장의 박동을 우주의 박동에 맞추는 것이며 나의 본성에 자연에 맞추는 것이란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