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삶의 질은 현격하게 높여준 GPS의 발명은 데카르트가 자신의 이름을 딴 데카르트 좌표계라는 체계를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매일 들여다보는 PC화면의 픽셀을 비롯한 모든 컴퓨터기술 또한 데카르트의 이와 같은 발명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많은 변수로 이뤄진 자료를 분석하는 통계 과학적 알고리즘에 데카르트의 체계가 이용되고 있음은 물론 우리가 평소에 하고 보고 사용하는 거의 모든 현대적 과학기술이 데카르트의 위대한 수학적 물리학적 발견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과학자라는 타이틀보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데카르트가 현대 의학의 초석을 다진 당대 최고의 뇌 의학자이자 생리학자 중 한명이었다는 점입니다. 데카르트의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모두 성공한 의사로 데카르트가 후에 생리학은 물론 해부학적 지식을 쌓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1650년 당시 스웨덴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후의 일들을 더욱 미스터리합니다. 그의 시신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머리 부분이 없는 채로 소설 다빈치 코드로 인해 더욱 유명해진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의 머리라고 추정되는 유골은 프랑스 파리 센 강 서쪽 건너편에 세워진 파리 인류 박물관에 따로 보관되어 있는데 아래턱과 이빨이 소실되었고 잉크로 쓴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두개골의 꼭대기에서부터 이마 아래까지 적혀있는 채로 인간 두개골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전시물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하버드대 과학사학과의 객원교수이자 세계적인 수학자이며 미스터리 작가이기도 한 아미르D악젤박사는 저서 데카르트의 비밀노트를 통해 데카르트를 둘러싼 놀라운 미스터리의 실마리를 풀어냈습니다. 그동안 데카르트는 물론 동시대의 다양한 분야의 이름난 학자들을 연구하고 관련 자료를 모아 분석해낸 것으로 데카르트와 관련된 미스터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떻게 오늘날의 과학과 철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의 학문이 중세의 암흑기를 헤치고 현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역사적 연구 결과입니다. 악젤 박사의 주장을 결론부터 말하자면 데카르트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데카르트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신 중심으로 흘러가던 중세 시대에 우주와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데카르트가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한 일종의 코드였습니다. 그는 시대를 앞서는 혜안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덕분에 오늘날 과학기술의 바탕이 되는 수많은 발견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시대를 앞서간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림으로 그의 깨달음을 전하려 한 것처럼 데카르트는 수학으로 코기토 코드를 전하려 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미스터리의 실마리는 다시 데키르트가 죽음을 맞이했을 무렵으로 돌아갑니다. 유난히 아침형 인간이었던 스웨덴 여왕을 가르치다가 잠을 충분히 못자 병이 난 데카르트는 폐렴에 걸려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군의 역사학자들과 데카르트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데카르트가 독살되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융는 당시 스웨덴 여왕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린 여왕이 스스로는 가톨릭 신자임을 주장했지만 그 사상과 철학때문에 무신론자로 지탄받던 데카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을 경우 루터파였던 여왕의 입지가 약해질 것을 우려한 측근들이 데카르트가 병든 틈을 타 그를 독살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병세가 호전되던 와중에 급작스런 죽음을 맞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런 주장이 신빙성을 더합니다. 또한 데카르트와 친분이 깊었던 프랑스 대사 피에르 샤뉘가 데카르트가 죽은 후 보인 이해하기 힘든 태도를 보면 데카르트가 빨리 죽기를 원한 또 다른 배후가 존재했을 거란 의심도 짙어집니다. 샤뉘는 데카르트를 스웨덴 귀족들이 묻히는 웅장한 대리석 무덤에 안장하려는 스웨덴 여왕의 의지를 꺾고 비참할 정도로 초라한 묘지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규모의 사람들만을 대동한 채 장례를 치르게 만들었습니다. 유럽 전역을 들석이게 한 위대한 철학자의 장례로는 가당치 않은 결정이었기에 데카르트가 죽은 후 몇 년이 흘러 그의 유골은 다시 본국으로 운구되었습니다. 데카르트의 유해는 처음엔 프랑스의 성 바오로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몇 번의 이장을 거쳐 1819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생제르맹 데 프레 성당에서 최종 안식처를 찾았는에 유골에는 두개골이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것도 파리에서 데카르트의 유해가 다시 안치되는 것을 지켜보던 스웨덴의 화학자 이왼스 야코프 베르셀리우스 남작에 의해서였습니다.